2.13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 12:5)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Psalms 12:5)
사람은 누구나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안전한 지대가 절대로 없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철학자는 현대사회를 ‘위험한 사회’ 라고 진단했습니다. 문명의 이기들은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젊은 다윗이 가는 곳엔 안전지대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 23:14) 우리는 안전지대(safe zone)가 아니라 신앙지대(faith zone)를 찾고 있습니까.
2.14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And the words of the LORD are flawless, like silver refined in a furnace of clay, purified seven times.”(Psalms 12:6)
유한한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자들과 그 행위가 도리어 부러움을 받는 시대,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 믿음대로 살려는 사람이 조롱을 당하는 시대상이 시편 12편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같이 살아도 어떤 사람 눈엔 하늘 보좌와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이는 하나님 말씀을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정제한 은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는 은혜입니다. 은은 풀무 불에 얼마나 정련하느냐에 따라 그 순도가 결정됩니다. 여러 번 거칠수록 순도가 높아집니다. 우리 믿음은 세상풍파, 하나님 말씀 안에서 몇 번이나 제련됐습니까.
2.1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How long, O LORD ? Will you forget me forever? How long will you hide your face from me?”(Psalms 13:1)
다윗은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며 1∼2절에서 되풀이해 묻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합니다. 루터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전쟁 흉년 질병 불의 등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이 생겼을 때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언제까지 숨어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런 물음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은 저 십자가에 달려 계셨고, 지금도 너희를 위해, 너희와 함께 거기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2.16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4)
“my enemy will say, ‘I have overcome him,’ and my foes will rejoice when I fall.”(Psalms 13:4)
평소 입만 열면 ‘주여 주여’ 하다가 정작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기분과 행동이 널뛰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믿으며 복되게 살라고 전도한 그의 외침이 무색해집니다. 질병이나 죽음 앞에서도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게 처신한다면, 사람이기에 그렇다고 이해를 하면서도 당황스럽습니다.
위기 앞에서 다윗은 신세타령이 아니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보는 주변 사람들이 기뻐하거나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할까 저어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면 그 자체로 이미 비웃음거리입니다. 이런 저런 풍파 앞에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2.17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But I trust in your unfailing love; my heart rejoices in your salvation.”(Psalms 13:5)
5절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분위기가 전과 사뭇 다릅니다. 5∼6절에 ‘나는 오직’ ‘나의 마음은’ ‘내가’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주변 환경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자아, 곧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된 자아를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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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지금 인생역전을 꿈꿉니다. 현재의 탄식거리가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안에서 기뻐 할 일로 바뀔 그날을 내다봅니다. 이것은 자신이 눈과 마음으로 보며 감지하는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통찰력과 사랑을 믿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뜻밖에 닥친 고난이 뼈아프면 뼈아플수록 그 역전이 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기에도 구원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견뎌내고 있습니까.
<정현진 서울 수도교회 목사>
2.18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시 14:2)
“The LORD looks down from heaven on the sons of men to see if there are any who understand, any who seek God.”(Psalms 14:2)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 선견자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대하 19: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따랐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둘째,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닐 때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할지를 여호와께 물었습니다(삼상 23:11).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위기라고 해서 아무데서나 무조건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평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생활 중에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현진 서울 수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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