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게시판 >
오늘의 QT(2.6-11) 운영자 2017-02-07
  • 추천 1
  • 댓글 0
  • 조회 1013

http://sudoch.org/bbs/bbsView/7/5229283

2.6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Arise, LORD! Lift up your hand, O God. Do not forget the helpless.”(Psalms 10:12)
 
시편 9∼10편에서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고 인륜을 상실한 채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로 인해 인생은 풍랑에 시달리는 돛단배 같은 처지에 빠지곤 합니다. 악인들이 기승을 부리며 득세한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과 개입하지 않은 것 모두에 깊은 뜻이 있음을 차차 깨달았습니다.  


악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펴보시는 분입니다(14절). 가난한 자(12절), 외로운 자와 고아(14절), 겸손한 자(17절), 압박당하는 자들(18절)을 우선 배려하는 분입니다. 이에 시인은 부조리한 환경보다 더 큰 믿음, 절망적 인생의 현실보다 더 큰 소망, 거칠고 험한 세상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품고 살아갑니다.  

 

2.7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In the LORD I take refuge. How then can you say to me: Flee like a bird to your mountain.”(Psalms 11:1)

다윗은 산을 피신처로 삼으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여기서 ‘나’(다윗)와 ‘새’가 대조됩니다. 새는 위기 앞에서 무기력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을 비유합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합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어느 곳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피신한 곳이 집안 은밀한 곳, 깊은 산, 외국 그 어디든 적대자가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몸이 안전한 곳에 있어도 마음은 결코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안에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그 마음 중심이 여호와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란 뜻입니다.  

 

2.8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When the foundations are being destroyed, what can the righteous do?”(Psalms 11:3)
 
세상은 말합니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만약 파괴 대신에 건설을 위해 결단한다면, 우리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면 아니 되는가.”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인류 역사가 보여줍니다. 문화창달, 기술진보, 정치 및 종교 체계의 우월성, 정보능력을 내세우는 순간부터 인간성과 세상은 붕괴됐습니다. 그때부터 터가 무너지곤 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사 24:20)라고 했습니다. 이는 개인에게도, 공동체(국가, 세계)에도 해당됩니다. 인생(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때 우리는 진정한 터전(하나님, 신앙)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2.9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For the LORD is righteous, he loves justice; upright men will see his face.”(Psalms 11:7)
 
 

다윗은 여호와는 참으로 의로우시며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의’란 말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비란 뜻으로 씁니다. 스페인 사상가 우나무노는 그리스 작가 카잔차스키와 만났습니다. 그때에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려는 것을 데스페라도(desperado)라고 했습니다. de는 떼어내는 것을, spera는 생명의 씨를, do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데스페라도는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포자기, 무자비, 무법(불법)으로 표출됩니다. 

어쩌다가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나님께로 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믿고 하나님의 자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얼굴을 뵈올 사람처럼 행합니까.

<정현진 서울 수도교회 목사> 

 

2.10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Help, LORD, for the godly are no more; the faithful have vanished from among men.”(Psalms 12:1)
 
시편 12편을 묵상하면 2500년 이상 된 글이라기보다 마치 오늘날의 것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이 글은 ‘도우소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경건한 자가 없어진다는 것과 신실한 자가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주전 2000년대 이집트에서 쓰여진 ‘자살 논쟁’에 ‘신사가 망하고, 폭력배는 누구에게나 폭력을 행사하며… 선은 어디서나 거부되고… 의인은 없으며, 땅은 어그러진 자에게 넘어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살던 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또 어떠합니까. 이런 때일수록 믿음 깊은 사람과 진실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부터 그렇게 되고 싶다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2.11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시 12:2)
 
“Everyone lies to his neighbor; their flattering lips speak with deception.”(Psalms 12:2)
 
  


시편 12편에는 언어생활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신성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할 때 언어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을 더럽히는 행위는 커다란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된 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두 마음’이라 표기했습니다. 곧 두 가지 심보로 모든 것에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흥부전에 ‘사람마다 오장육부로되 놀부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사부(心思腑)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병부주머니를 찬 듯하여…’라는 대목을 연상시킵니다. 그런 자들은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4절)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런 생각에 수긍합니까.

<정현진 서울 수도교회 목사>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오늘의 QT(2.13-18) 운영자 2017.02.16 1 1005
다음글 오늘의 QT(1.31-2.4) 김건호 2017.02.01 1 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