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웰에이징, 웰다잉(신 34:5-12 ; 요 16:5-13) | 운영자 | 2017-05-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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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에 없던 배짱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요한복음 16:8처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모셨습니다. 세상의 죄와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향한 비전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에 관한 기대감이 자랍니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세상의 유혹이나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배포가 생깁니다. 진리의 성령을 모신 사람이 지닌 가장 큰 배포는 생사의 문제를 초월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생하고 수고하고 헌신한 모든 것에 대한 상급이 천국에서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 천국은 여기에 비할 바 없이 좋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더라도 그 천국을 향한 소망이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교리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가 가르치는 천국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머리로 알고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렇더라도 천국을 향한 믿음이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태도를 극복하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과 마음에 살아 작용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을 믿는 믿음과 그것을 바라보는 소망이 영적으로 확립된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마음깊이 받아들이는 것이요, 인생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회퍼 목사님은 어느 날 간수가 와서 감방문을 두드리자, 직감적으로 자기가 사형당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그 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는 동료들에게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 “여러분, 죽음의 시간이 이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마치 어디 좋은 곳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 기대에 찬 모습으로 떠나듯이, 그 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간수를 따라 가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감동을 받고, 천국의 소망과 평화를 느꼈다고 합니다. 신명기 34:7-12는 모세의 일생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120년과 그가 행한 능력이 네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적 기사 권능 위엄. 이것을 통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는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아무리 탁월한 능력자라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굉장한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웰빙을 이야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게 잘 살자는 말입니다. 그러더니 웰다잉을 이야기했습니다. 죽을 때 잘 죽어야 웰빙에도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니 웰빙과 웰다잉이 조화를 이루어야 복있는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웰빙과 웰다잉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웰에이징에서 그 대답을 찾았습니다. 웰에이징이란 하나님 안에서 자기 나이에 걸맞는 모습으로 나이값을 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은 제 나이에 알맞게 살다가 제 나이에 알맞게 사라지더라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사에 영원히 함께 계신다!’(창 48:21 참조)고 하십니다. 이런 뜻에서 웰빙하고 싶고 웰에이징하고 싶고 웰다잉하고 싶은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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