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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어떻게 쓸까? (왕하 4,2-7; 막 14,3-9) - 전문 운영자 20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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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왕하 4,2-7; 막 14,3-9)

 

 

16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왕하 4,2-7; 막 14,3-9

어디에 어떻게 쓸까?

 

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오늘의 증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19바이로스 사태로 우리는 불안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을 어김없이 흘러갑니다. 코로나 19가 처음 알려졌을 때가 설 무렵이었는데, 어제는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청명(淸明)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농부가 농사일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오늘은 한식이자 식목일입니다. 바야흐로 새봄의 기운이 온 세상에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심란해도 세월의 흐름은 변함이 없어 개나리와 진달래와 목련이 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불안한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가 어김없이 여러분에게 찾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시몬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시몬은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을 통해 나은 것에 감사하며 그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식사를 한창 하고 있을 때 어떤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손에는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이 들려있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히말라야 산에 있는 특별한 나무 뿌리에서 뽑아 낸 것입니다. 여인은 갑자기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옥합이 깨졌으니 다시는 뚜껑을 덮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옥합 안에 있는 향유를 남김 없이 다 써야만 합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기 몸에 나드 향유를 붓는 이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9)

 

그 집 전체가 나드 향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4-5절입니다.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4-5)

 

그 여인이 예수님 몸에 부은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이 넘습니다. 300데나리온은 그 당시 일반노동자 1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그 향유의 값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년치 연봉이 넘습니다. 그 큰 금액을 하루 저녁에 다 날리다니요? ‘말도 안돼’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만일 이 사람의 말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가 그 여인을 책망하는 핵심은 왜 그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면 훨씬 보람 있을텐데 왠 감상적 낭비냐고 힐난했습니다.

 

여인에게 비난을 퍼붓는 그 사람의 태도는 평범한 일상에서 보면 당연히 옳은 말입니다. 그것이 다 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세계에는 그런 실용성, 합리성, 도덕성, 사회성에만 머물 수 없는 절대적인 깊이, 은혜의 차원,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차원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성 사회성만 생각하다보면 그 사람은 실수가 적고, 크게 흠잡을 일 없는 모범적 종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폭풍이 몰아치는 태풍 한 가운데를 지나 절대 평강에 이르는 신앙의 깊은 경지를 평생 모른 채 일생을 마치고 맙니다.

 

두 번째 반응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6 ...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어떻습니까? 얼핏 보기에 이 말씀은 평소 예수님의 처신과 너무나 달라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65년 전 폴 틸리히(1886-1965)는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는 설교집을 냈습니다. 그는 이 여인의 헌신을 가리켜 ‘거룩한 낭비’(Holy Waste)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손해를 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 눈을 들어 자연계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거기에는 합리성이나 능률성이나 효율성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현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광대합니까? 수천만 수억 개의 별이 지금도 허허막막한 우주속에서 팽창해 나갑니다. 우리는 우주천문학을 통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천만 수억 개의 별자리들 가운데 생명체가 사는 녹색행성은 아직까지는 지구 하나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구촌 이 한 곳을 위하여, 밤하늘에 은빛 가루를 뿌려놓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수천만 수억 개의 천문세계를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이 우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로 오늘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 일에 몰두하다보니 우리는 ‘숭고함’을 잊고 삶니다. ‘숭고하다’(sublime)는 감정은 ‘장엄하다’(majestic)는 감정이나 ‘우아하다’(elegant)는 느낌과 다릅니다. 이것은 거룩한 실체를 체험하며 저절로 우러나는 아주 독특한 감정입니다. 예술작품을 봅니다. 이집트 피라밋이나 중국 만리장성을 보면 ‘장엄하다’는 감정은 생기더라도 ‘숭고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다윗상,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 같은 조각품을 볼 때 ‘우아한 완전미’에 감탄 할 순 있어도 ‘숭고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피에타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자기 아들을 껴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이 피에타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엄함이나 우아함보다는 ‘숭고함’을 느낍니다. ‘숭고함’의 감정은 규모가 크거나 아름답거나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기희생이라는 종교적 신비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대하는 인간의 감정이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주의와,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주의와, 크고 힘 센 것을 숭배하는 거인주의를 앞세우느라 ‘숭고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숭고하고 거룩한 실재’를 지향해야 할 종교인마저도, 성공과 풍요와 거대함과 세속적인 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종교나 종교인 중에는 번창하는 이가 있지는 몰라도, ‘그 종교와 그 종교인’에게서 ‘숭고함’이 풍겨나지는 않습니다.

 

베다니의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이 일은 우리에게 종교적 진리세계, 참다운 영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정말 궁극적인 것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비애의 양면적인 역설, 그리고 참다운 새로움과 창조성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자기희생을 오래 오래 묵상하게 합니다.

 

사람 몸에 향유를 붓는 이스라엘의 관습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종교적 행위입니다. 누군가를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로 세울 때, 이렇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장례의식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최상의 존경과 추모의 표현으로 그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렸습니다.

 

베다니에서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은 그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요? 그 여인이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관계없이 이것은 예수님이 곧 만왕의 왕이요, 메시야로 세워질 것을 확인하는 행위였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십자가에서 죄없이 죽어야하는 의로운 사람을 향해 살아남을 자가 드리는 정성어린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아직 영적으로 눈먼 제자들은 이번 주 안에 닥칠 십자가 사건을 꿈에도 모른 채, 장차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에게 생겨날 좋은 일을 상상하며 다투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 여인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거기 든 향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예수님 몸에 부으면서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을 향한 숭고한 애정과 배려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그 여인 사이에 흐르는 이심전심의 교감을 나누셨습니다. 막 14:9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성경에서 기억하라와 기념하라는 말은 같은 낱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어떤 것을 기념하라(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딱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만찬 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 곧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몸에 부은 일입니다. ‘기념’이란 매우 뜻 깊은 어떤 것을 잊지 않고 생각하며 기리는 일을 가리킵니다.

 

숭고한 낭비, 거룩한 낭비는 억지로 하거나 의무로 하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당장 또는 가까운 장래에 보상을 받으리라 기대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무엇인가 무조건적인 것에 그 사람의 심령이 감동되고 붙잡혀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기에 자발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거룩한 낭비(숭고한 낭비)’에 가까운 행위를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연인 사이의 순수한 사랑에서 부분적으로 봅니다. 그것은 계산적 사랑도 아니요, 보상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식과 애인이 혹은 부모가 사회에 없어서는 아니 될 훌륭한 재능과 공헌을 할 인물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오직 ‘사랑에 이끌려’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이런 것을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창조주 하나님 가슴에 불타는 가장 신비한 속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언어, 시간, 재물, 체력 재능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쓰여지는 곳에서 인간성이 드러납니까, 아니면 인간성을 초월하는 숭고한 맛, 거룩한 향기가 풍겨납니까?

 

요즈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소비가 급속하게 감소했습니다. 이로 d니해 크고 작은 사업을 하는 분들이 큰 곤경을 처했습니다. 경제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부만 바라보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과식운동’을 합니다. ‘과식운동’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식당에 가서 세 사람 내지 네 사람 분량의 식사를 주문한다고 합니다. 많이 먹고 남는 음식을 싸 가지고 집으로 가서 다른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식당을 도와줍니다. 과식 운동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숭고하지 않습니까?

 

숭고하고 거룩한 낭비는 300데나리온 나가는 값비싼 향유를 드리는 일에서도 체험됩니다. 그런가하면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방울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바치는 어떤 여인의 지극히 작은 정성에서도 체험됩니다.

 

코로나19로 어렵다 어렵다 불평만 할 것이 아닙니다. 평소 보다 책을 한 권 더 사고,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 더 사주고, 늘 아껴쓰던 평소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일부러 소비를 하는 것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우리 인생여정에서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이라도 우리 맘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올라서, 한편으로 보면 어리석다 맹목적이다 라고 보일 정도로 숭고한 낭비와 거룩한 낭비가 되풀이 체험되기를 소망합니다. 섬세한 마음을 드리는 위로와 배려에서, 시간을 드리는 헌신에서, 재물을 드리는 헌신에서, 은사와 달란트를 사용하는 헌신에서 세상적으로 보면 어리석고, 영적으로 보면 가슴 뿌듯한 경험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벅찬 감정이 신앙생활에서 주어지는 최고의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온 인류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리시려고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거룩한 낭비 중에서 최고 낭비’인 자신의 몸과 생명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습니다. 창조주 우리 하나님은 허물 많고 연약한 나와 같은 피조물을 차마 놓아버리지 못하고, 사랑과 은혜를 쏟아붓는 거룩한 낭비를 오늘도 계속하십니다.

 

무조건 옥합을 깨뜨려 예수 몸에 바르고 자기 머리털로 씻는 여인의 저 깊은 심정을 모르고, 합리성과 효율성과 도덕성의 수준 안에서 힐난하는 제자들과 같은 심정을 이제는 버리고, 거룩하고 숭고한 낭비를 하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신비한 기쁨과 감격을 끌어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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