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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민중 위해 5·18민주화운동 뛰어든 고 문용동
정주현 2020-05-15 추천 0 댓글 0 조회 38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전대 부속병원 영안실의 시체 시체들. 병원마다 꽉 메인 총상 환자들, 칼빈 소총과 M1으로 무장하고 눈이 뒤집어진 시민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1980년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문용동 전도사는 5·18 참상을 수첩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하는 학생들과 이를 돕는 시민군을 학살했다. 광주시민들은 자국민에 총부리를 겨눈 군에 맞섰다. 시민군이 조직됐고, 문 전도사도 합류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봄부터 전국 대학가에서는 신군부를 반대하는 시위가 터졌다. 광주에 있는 전남대·조선대 학생들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호남신대 4학년이던 문 전도사가 처음부터 시위에 적극 참여한 건 아니다. 5월 10일 자 그의 일기장에는 "저 소요 사태(민주 회복 운동, 학원 자율화, 계엄 해제…)를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난 그냥 있어야만 하는가"라고 적혀 있다.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들의 본격적인 시위는 5월 14~16일에 일어났다. 전두환 신군부는 17일을 기점으로 계엄령을 확대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학생들만 붙잡아 가던 군인들은 시간이 지나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력과 살상을 저질렀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직접 목격한 문용동 전도사는 시민군에 합류했다. 광주시민을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계엄군에 분노했다. 사진 제공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문 전도사는 18일 자 일기에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그대로 썼다. "무자비한 공수부대, 곤봉과 군화 발질로 학생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기고 군화로 짓이겨 군용 트럭에 싣는다. 학생이나 시민이나 달려들어 개 패듯이 끌고 간다. 목사님(항의하는)도 군화 발질"을 당했다면서 "심는 대로 거둔다.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 적었다.

당시 문용동 전도사는 군인에게 폭행당하고 있던 한 시민을 구했다. 일기장에 '반기절한 시민'을 도보로 40분이나 걸리는 기독병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했다고 썼다. 문 전도사는 이 일을 계기로 5·18 항쟁에 뛰어들었다.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은 오히려 광주시민을 불순분자로 몰아가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문 전도사는 격분했다. 5월 22일 자 일기에 "계엄 당국의 엉터리없는 오도,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 사태가 몇몇의 불순 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고 썼다.

문용동 전도사는 초급장교를 교육하는 상무대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문 전도사가 시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교회에 알려졌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문 전도사 후배인 이우주 목사는 당시 "무슨 전도사가 데모를 하는가. 오히려 데모를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문 전도사는 "세상이 어렵고 민중이 고통당하는데, 이럴 때 목사들이 앞장서 나가야 한다. 모세를 보라.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갔지 않느냐"고 반문했다(<새벽길을 간 이> 초판, 49쪽).
폭발 우려해 뇌관 제거 작업
"신학도로서 폭발물 방치할 수 없어"
가족·친구 만류에도 도청 사수

시민군에 합류한 문용동 전도사는 도청 지하에 있는 탄약고를 관리했다. 당시 탄약고에는 총기류, TNT, 다이너마이트, 수류탄 등이 보관돼 있었다. 문 전도사와 함께 탄약고를 관리했던 5·18 민주 유공자 김영복 집사(광주서석교회)는 2010년 5월 제3회 순교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군 무기고만큼 많은 물량이 있었다. 탄약과 폭약이 일시에 폭발했다면 광주는 잿더미가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겠다고 판단, 5월 25일 밤 9시경 군 전문가를 데려와 뇌관 제거 작업을 했다. 분리한 뇌관, 도화선 같은 발화 물질은 식량 창고로 옮겼다.

도청을 사수하고 있을 때, 한발 물러나 있던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26일 문 전도사의 누나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철수하자고 요청했다. 문 전도사는 거절했다.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고, 만일 자신이 숨지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문 전도사를 만났던 친구 윤상현 목사는 2007년 5월 열린 제1회 순교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지금 뇌관은 분리해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신학도로서 주님의 종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해 두고 도저히 떠날 수 없다',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되뇌며 기도함으로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소문대로 계엄군은 다시 밀고 들어왔다. 27일 새벽, 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향해 투항하고 나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계엄군은 투항한 시민군에게 총을 쏘아 댔다. 이 과정에서 문 전도사도 숨을 거두었다.



문용동 전도사는 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사수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계엄군 첩자 역할?
"프락치였다면 먼저 도망갔을 것"
기념사업회, 순교자 추서 요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광주를 위해 희생한 문용동 전도사를 기리는 작업은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뇌관을 제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 '프락치' 의혹이 제기돼 온 것이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문 전도사를 지켜본 김영복 집사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했다. 김 집사는 5월 11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만약 문 전도사가 프락치였다면 죽지 않고 미리 (도청을) 빠져나가지 않았겠나. 논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단언컨대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총무 도주명 목사도 "프락치라면 자기의 이익을 좇아 도망가지 않았겠나. 거기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용동 전도사를 둘러싼 오해는 벗겨지고 있다. 호남신학대학교는 2000년 2월 문 전도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2006년에는 추모사업회가 조직됐고, 이듬해부터 순교 기념 학술 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2년 추모사업회는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윤상현 회장)로 이름을 바꿔 활동해 왔다. 기념사업회는 문 전도사 추모 자료집 <새벽길을 간 이>(한들출판사)를 펴내기도 했다. 자료집에는 문 전도사가 쓴 일기, 설교 등이 담겨 있다.

문용동 전도사가 몸담았던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김태영 총회장)은 2016년 9월 101회 총회에서 그를 순직자로 인정했다. 기념사업회는 문 전도사가 단순히 의로운 행위를 한 순직자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신앙의 내적 동기에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를 했다면서 총회에 '순교자' 추서를 요청해 놓은 상황이다.



호남신학대학교에 있는 문용동 전도사 추모비. 뉴스앤조이 최승현
복음 전파 위해 신학교 진학
"인생의 목적 재물·명성 아닌 선과 사랑"
교회의 대량화·물량화·비대화 비판도

문용동 전도사는 1952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3남 5녀 중 차남으로,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문 전도사는 학창 시절부터 틈틈이 자기 생각을 글로 남겨 왔는데, 그가 어떤 가치관과 신앙관을 지니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그의 생전 글들은 <새벽길을 간 이>에 실렸다.

문 전도사는 고등학생 때 처음 교회에 출석했는데,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1970년 4월 12일 교회 출석. 인상이 안 좋다. 평소 생각할 때 성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니기는 다녀야겠다. 믿는다는 게 얼마나 큰지 보고 느꼈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신앙은 깊어졌다. "1972년 7월 20일 기도. 기도를 쉬지 말고 하자. 언제나 기도하며 좀 더 가까이하고. 내 소망 이룩하며 살아가리."

사회 전반적으로 가난하고 불우했던 시절. 문 전도사는 굶주린 아이를 도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난한 환경과 이름 모를 병 때문에 학대를 받아 집을 뛰쳐나온 나이도 모르는 불쌍한 소년. 그도 인간 나도 인간. 어찌 빈부의 차와 인간적인 차가 그리 많을까. 이 사회에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 어떻게 구제할 수 없을까? 돈이라도 넉넉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굶고 발이 부르터 걸을 수가 없었다. 차에 태워 집에 데리고 왔다. 따뜻한 밥과 옷을 주고 다음 날 여비를 장만해 고향으로 보내 줬다. 주님의 뜻이란 명분으로."

광주제일교회에 다니던 문 전도사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구락부 국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교회가 운영하는 구락부에서는 국어·체육·지리·역사·신앙 등을 가르쳤다. 문 전도사는 아이들에게 가난하다고 해서 실망·절망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고 살자고 권면했다.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일념으로 1973년 호남신대 신학과에 지원했다. 문 전도사는 "어둔 세상의 밝은 빛이 되고 부패와 추악 속에서 소금이 되는 게 차라리 다른 대학보다 나을 것 같다"고 썼다. 문 전도사는 기독교 복음의 정수인 이웃 사랑을 깊이 묵상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오직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자.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마음에 절대적인 사랑. 행함과 진실. 날 사랑치 않는 이를 사랑. 이웃의 발을 씻기는."

"작은 일에 신실하면 큰일에 신실하는 거다. 인생의 목적이 재물과 명성이 아니라 선과 사랑을 위해서 몸 바칠 진리의 수호 사랑. 나를 죽이는 것. 세상이 몰라 줘도 괜찮다. 나의 주님이 항상 동행하시니 그러면 된다. 나의 주님이 항상 동행하시니까."



문용동 전도사는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했다. 사진 제공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문용동 전도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병폐를 일찍이 목격하고, 경고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교회가 Diaspora. (내 자신)이 불우한 이웃의 울부짖음(강도 만난 人) 병들고 갇히고 억눌리고 소외당한 자의 내밀린 손길을 외면할 때 교회 행사로 그쳐 버릴 때의 진노의 책벌. 교회가 진짜 교회인 것은 이웃을 위할 때이다. 물량적이고 숫자적이고 형식적인 교회. 진정 메마르고 이웃에 대함에 고갈된 현대 교회."

"교회는 신자는 저 높은 곳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 구원받고, 은혜받고 성전의 높은 담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중략) 교회 본연의 목적은 이웃을 위함. 세상을 향한 교회이다. 즉 선교인 것이다. But 많은 교회 대량화, 물량화, 비대화 많은 예산 자체 소비. 자체 내의 Program으로 만족. 세상을 향해선 선교를 향해선 조금만 투자."

기념사업회 총무 도주명 목사는 "문용동 전도사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지만, 사회든 교회든 잘못된 게 있으면 목소리를 높였다. 또 개인과 사회를 중요시하는 통전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인간을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모습은 현대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상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새벽길을 간 이>(한들출판사)에는 문용동 전도사의 일기·설교를 포함해 목사, 지인, 학자들의 글이 실려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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