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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힘을 주는 정보(대상 4,9-10; 요 21,15-19) - 전문
정현진 2020-05-05 추천 2 댓글 0 조회 69

200503(대상 4,9-10; 요 21,15-19)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1-2)

 

대상 4,9-10; 요 21,15-19

위로와 힘을 주는 정보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오늘의 증언

 

2월 마지막 주일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드린 뒤 우리는 지난 9주 동안 가정(영상)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두 달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주일이 아홉 번 지나는 동안 많은 것을 참으며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생명사랑의 정신을 발휘하신 성도 여러분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역병(大疫病) 혹은 전염병이라 하면 우리는 중세 14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을 생각합니다. 그 질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지 일이 줄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역병은 그 시대에만 생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전염병은 계속 발병하여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합니다. 가까운 예를 들면 1957년의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2002-2003년 사스, 2003-2009년의 조류독감, 2009년의 신종플루, 2015년의 메르스 등이 있습니다.

 

야베스는 ‘나의 지역(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에서 ‘지역 또는 지경’을 넓혀주십사는 기도는 무슨 뜻입니까? 코로나19에 대처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야베스의 이 기도와 정반대로 엇나간듯이 보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모이는 예배의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를 향해 종교탄압이라고 하는 한국개신교회는 안타깝게도 복음의 지경을 넓히기는커녕 오히려 좁히는 일에 앞장서고 말았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저는 수도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코로나19 환자를 돌보는 일에 직접 앞장서지는 못했더라도, 모이는 예배를 최대한 자제하며 성숙한 모습으로 참고 기다리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이야말로 역시 수도교회 성도답습니다.

 

전염병 같은 질병이 창궐할 때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교회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겠습니다. 시계를 로마시대로 돌려봅니다.

 

첫 번째 역병은 165년 겨울에 생겼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라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황제가 있습니다. 그 시절 근동 실루기아에서 발병한 역병이 15년(161-180년) 동안 로마제국 전체로 퍼졌습니다. 이 역병을 가리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병의 확산을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병의 치사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던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도 180년 3월 이 역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에 따르면 당시 로마제국 인구의 4분의 1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의사인 한스 진저(Hans Zinsser, 1878-1940)는 ‘사망자가 아주 많아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이 비고 황폐화되었다"고 했습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20)

 

그로부터 약 100년 뒤 두 번째 역병이 로마제국을 휩쓸었습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249년부터 262년까지 11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연두나 홍역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습니다. 그때 로마시에서만 하루 5천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의 2가 줄었다고 여겨집니다.(보우크 A. Boak; 스타크, 121)

 

이런 때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는 “이교도들은 처음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를 내쫓았고, 가장 가까이 이는 자들이 먼저 도망쳤고, 병든 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버려지고 매장하지 않는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이렇게 해서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고자 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려웠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와 달랐다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와 성도들은 전염병에 걸린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폈고 다시 회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리나 이교도들과 달리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신다. 이 모든 선하심을 주님의 백성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베푸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이상규, 헬라로마적 상황에서의 기독교)

 

역병이 절정에 달하던 260년 부활절에 교부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 주었으며 조금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보살폈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성도 가운데 어떤 이들은 평안과 기쁨 속에서 병자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환자를 돌보다가 병에 감염되자 그들은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성도가 병든 이들을 기독교인 이교도를 가리켜 않고 간호하고 치료하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은 영혼의 손(Love is the hand of the soul)’이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당시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 곧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성도들 중에는 병든 자를 간호하고 도움을 베풀다가 같은 병에 걸려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천국을 믿는 그들은 즐겁게 평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아주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습니다. 가족들마저 자기를 버리고 피신하는 바람에 굶고 지내던 환자가 많았는데,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회복하는 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의술도 발달하지 않았고, 의료진도 절대 부족한 상태였기에, 오늘날과는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환자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 효과도 아주 컸습니다.

 

역병 앞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부모형제도 버리고 도피했던 이교도들에 비해 기독교인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또 성도들이 베푼 형제자매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로마제국이 박해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나중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유럽사회가 기독교화 된 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과 영생을 믿으며 자기가 전염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던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베스가 기도드린 그대로 ‘지경을 넓혀’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불안한 심리를 타고 허위정보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오죽하면 이단종파보다 무서운 것이 ‘카톡교’라는 말까지 생겼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기독교인이 가장 신뢰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 3:16-17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 가득 품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혹독하게 겪는 과정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거부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은 시몬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이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이날 만남에서는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을 상징하는 베드로란 이름이 왠지 어색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베드로는 반석이 아니라 푸석 푸석한 돌처럼 깨어지고 말았으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주어진 사명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여 물고기를 잡는 모습은 아무래도 반석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시몬과 순수하게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몬이라는 호칭에는 “시몬아, 너는 지금 나를 부인했던 그 일로 상심하고 있느냐? 나는 너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그 일로 더 이상 마음 쓰지 말거라. 이제 다시 복으므이 지경을 확장하는 길로 나서라”하는 권면과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성을 이해하셨습니다. 인간은 깨지기 쉽습니다. 결점이 있고 실수가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용기를 잃고 좌절하곤 합니다. 거짓말도 할 수 있고 때로는 배반도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 모두 다 이런 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인 베드로를 다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세 번 되풀이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랑의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아르니온)을 먹이라’에서 어린 양이란 말은 양떼에서 특별히 어린 양을 가리키는 지소어입니다.(꼬마, 꼬맹이 diminutive) 이는 어떤 낱말에서 그 낱말에 들어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작은 개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린 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유아기에 있는 양을 가리킵니다.

 

‘내 양을 치라’에서 프로바치온(probation)은 장성한 양을 가리키는 프로바톤(probaton)의 지소어입니다. 이는 어린 양(arnion)보다는 크고, 아직 장성하지 못한 양을 가리킵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청소년기·청년기에 해당됩니다.

 

‘내 양을 치라’에는 이미 성장과정이 끝나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양을 나타내는 프로바톤(probat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시간이든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 돌보며, 어떤 사상이나 태도에 구애받지 말고 다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럽기는 해도 양육의 책임을 져야하는 부담이 느껴지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아래 위도 제대로 몰라보는 사춘기에 처한 청소년이나 좌충우돌하는 청년기처럼 매사에 반항적이거나 심사가 꼬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꼰대처럼 자기 주관이 너무나 뚜렷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거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에게 돌보라고 맡긴 사람은, 그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를 구별 없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양이라 생각하며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서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 양(아르니온)은 아닙니까? 틈만 나면 반항하며 혈기를 부리는 사람(프로바티온)은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꼰대(프로바톤)는 아닙니까? 사정이 이런데도 예수님은 ‘너는 내 양이 아니라’며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 소식들 가운데 어떤 것은 누군가에 대해 혐오하거나 멀리하거나 비방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정보의 진흙탕 속에 살기에 팬데믹(세계적인 전염병)보다 인포데믹(정보감염병)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시고, 우리와 나를 사랑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우리 어깨에, 우리 심령에 주어진 사람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순간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자신에게 속삭이시는 사랑의 언어를 기억해내십시오. 생명의 말씀 사랑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묵상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의 정보가 담긴 언어를 기억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 십자가, 환경 십자가가 제 아무리 무겁고 큰 것이라도, 거뜬히 지고 갈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십니다. 이와같은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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