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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으로 (레 16,20-22; 히 13,12-15) - 전문 운영자 20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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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9(16,20-22; 히 13,12-1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 22-24)

 

 

16,20-22; 13,12-15

영문 밖으로

 

 

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오늘의 증언

 

우리 자신이 마치 병균처럼 주변 사람을 병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섬뜩하게 들리는 이 말이 지금은 우리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인 우리는 생명과 건강에 거슬러 강도질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만난 우리 국민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강도같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여리고성 근처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애써 무시하고 예배드리러 가는 레위인(제사장)처럼 행동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마리아 사람 같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모여서 드리는 예배보다는 가정예배·영상예배를 드리는 것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섯 번째로 영상예배를 드립니다. 이마 다음 주일 예배에도 우리는 가정예배·영상예배를 드릴 것 같습니다. 진정 어렵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19라는 이름을 가진 강도를 만난 우리 자신과 이웃과 동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이웃이 되고자 하는 심정으로 인내하며 이전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은 사순절기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고난 절기에 부르는 찬송가 1581절입니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에 길이라네.

 

이것은 '다뉴브강의 잔잔한 물결'이라는 곡에 주기철 목사님이 쓴 신앙고백적인 찬송가입니다. 영문(營門) 밖의 길이란 표현이 세 차례 나오는 히 13:11-13을 봅니다.

 

11 ...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기에는 세 차례에 걸쳐 성문 밖으로(또는 영문 밖으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중심으로 천막을 치고 생활했습니다. 그곳을 가리켜 진영또는 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 안쪽이 아니라 바깥 쪽을 가리켜 영문 밖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진영(진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기에 거룩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진영 바깥은 거룩하지 못한 곳, 부정하고 안전하지 못한 곳입니다.

 

신명기 23장에 따르면 화장실도 진 바깥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에 바쳐질 짐승을 잡고 난 뒤 쓰지 못할 것들을 진밖에 가져다가 불살라버렸습니다.(16:27)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피부병에 걸린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진 안에서 격리되어 진 바깥에 거주했습니다. 레위기 24장에 보면 사람을 사형에 처할 때에도 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온통 부정적인 모습으로 가득 찬 이곳을 성경은 긍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 영문 밖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레위기 16장입니다. 레위기 16장에는 일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대속죄일 행사가 있습니다. 이 날을 대신할 대()자를 써 대속죄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욤 학카페림 = a Day of the Atonement) 랍비들은 속죄일을 가리켜 그 날(The Day) 또는 그 큰 날(The great day)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이 날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백성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 제사장은 대족죄일에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백성의 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아마 그 염소는 가만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염소는 발버둥을 쳐 댈 것이며, 그러다가 대제사장이나 그 염소를 잡고 있는 레위인들을 걷어차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대제사장은 중단하지 않고, 두 손을 그 염소의 머리에 얹은 채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죄를 빠짐없이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그 때마다 백성이 지은 죄 하나 하나는 그 당사자를 떠나서 그 염소에게로 옮겨집니다. 백성의 죄 하나 하나가 고백될 때, 그것은 마치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숫염소가 지은 죄인 것처럼 취급됩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백성의 한 사람이며,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기도드리는 대제사장은 마치 내 죄를 내가 아니라 자기가 지은 것처럼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지은 죄는 내게서 떠나 그 염소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와서 그 염소를 영문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끌려나가는 염소를 바라봅니다. 그 염소는 차츰 차츰 멀어지더니, 마치 점 하나처럼 작아지더니,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편 103:12 말씀 그대로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셨다는 고백이 우리 각 사람의 고백으로 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이 날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아주 특별하게 보냅니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고, 사람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쉽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속죄일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냥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됩니까?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보다는 일생생활의 분주함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오가는 온갖 번잡한 생각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 앞만 보고 달립니다. 눈에 띄는 일, 손에 잡히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좌우를 돌아볼(左顧右眄) 틈이 없습니다. 나의 행실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오늘 일하는 것이 나 자신과 가족에게 진정 유익하게, 제대로 하는 것인지,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우리 사회와 인류 역사에 어떤 뜻이 있는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어떤 효력이 있는지를 되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나 잘되고, 나 좋고, 나 편하면 된다는 식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렇게 살던 사람이 일 년에 단 하루, 이 날 만큼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찾아내라는 뜻입니다. 자기 인생이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쓰임받을지를 곰곰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일이 매우 중요하기에 레 16:20-22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그날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을 위한 숫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그 짐승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죄를 속하는 날에 백성의 죄를 온통 다 뒤집어쓰고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이 희생양입니다. 그 희생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영문 밖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두 번째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의 길로 나아오셨습니다. 죄로 물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려고, 세상과 사귀는 우리를 하나님과 사귀게 하시려고, 영문 안에 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도성에 살게 하시려고, 세상 짐에 눌려 사는 이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예수님은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세속의 온갖 행동과 이념으로 더러워진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몸소 고난의 현장 영문 밖으로 향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여, 피묻은 그 십자가를 거쳐서 하나님과 연합할 뿐만 아니라 고난당하는 약자들과 연대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문 안과 밖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다음은 영문 밖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8:34)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란 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말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다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자기 십자가 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을 걸어도 좋은 인생의 사명을 가리킵니다. 올바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자기 목숨 걸어도 아깝지 않을 사명을 발견하고 그 길을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비전을 발견하고 그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이름을 날렸느냐, 얼마나 업적을 쌓았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길, 다시 말해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발견하고는, 비록 힘들지라도 때때로 외로울지라도 자주 넘어지더라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작사하신 찬송가 158장은 이렇습니다.

 

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고 /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보여주니 / 온갖 고통 다하여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드리며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온 인류를 제대로 살게 하시려고 영문 밖으로 끌려나가셨던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게, 조금이라도 더 안락하게, 조금이라도 더 자기에게 유익하게하느라 위 아래, 옆과 뒤를 둘러볼 틈도 없이 치닫기만 하던 우리가 사순절기를 맞이하여 잠시 멈추어봅니다.

 

사순절기가 무엇입니까? 저는 잠시 멈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중심으로 내닫던 발걸음을 잠시 멈출 때, 하나님은 잠시 멈추며 자신과 세상과하나님의 목적을 돌아보는 우리에게 인생을 제대로 사는 지혜와 용기를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과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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