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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말 한 마디 (사 66:10-14; 고후 1:3-7) - 전문
운영자 2020-03-23 추천 2 댓글 0 조회 59

200322(사 66,10-14; 고후 1,3-7)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사 40:1-2)

 

 

사 66,10-14; 고후 1,3-7

위로하는 말 한 마디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오늘의 증언

 

영국에 ‘카리니’라는 유명한 코미디언이 있었습니다. 기발한 재담으로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우울증이 심해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용하다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여러 시간 상담을 한 뒤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특별한 문제는 없네요. 다만 우울한 감정이 계속 쌓여 있습니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으니 그저 유쾌하게 자주 웃으세요. 그러면 나아지실 겁니다.” 카리니가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그 사람 있잖아요. 카리니! 그 사람이 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자주 보며 마음껏 웃어 보세요. 분명히 나아지실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세상에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일이 말하지 않더라도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우울한 생각으로 괴로워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 질병, 실패, 불화, 갈등, 죽음 등이 우리 인생을 공격해옵니까?

 

지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고 있습니까? 코로나19, 경제위기,... 아닙니다. 두려움(공포)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건이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곤 합니다. 사도 바울 일행도 그랬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8b 와 9a에 보면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다’고 했으며, 10절에서는 그런 상황을 사형선고(개역: 큰 사망)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경험해왔듯이, 공포(두려움)의 수명을 그리 길지 않습니다. 비록 공포의 길이는 길지 않더라도, 두려운 일이 찾아올 때 우리가 느끼는 압력은 대단합니다. 그런 스트레스와 압력을 많이 겪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시련에 찌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고생에 찌들어 있는 사람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만사에 의욕을 잃어버리거나, 악에 바쳐서 악바리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다른 하나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단련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분이 쓴 신약성경 가운데 13권 어디를 살펴보아도, 그가 고난에 찌들거나, 위축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며, 부당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오히려 찬송을 불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모습이 사도 바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럴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선 1장 10절 말씀을 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이 자기에게 있을 것을 확신하며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위로와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를 믿으며, 그 믿음에 바탕하여 시련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시련과 고통을 더 이상 견뎌 낼 힘도 없고, 살아나갈 소망도 완전히 끊어졌다고 판단될 정도가 될 때까지 내버려두시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곧 세상과 자기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시련은 단순히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함만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정을 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납니다. 자기자신이나 세상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우리 인생은 이성과 영성을 잃을 뿐만이 아니라, 평화와 보람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나면,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은 물론, 앞 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이런 체험과 깨달음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1:5)

 

믿음 속에서 이런 새로운 경지를 깨달았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자신과 남이 보기에는 죽을 지경에 처했으면서도 하나님을 가리켜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아버지" 라고 찬미하였습니다. 고후 1:3-4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가? 모든 경우에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 다시말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위로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소개하면서 사도 바울은 고후 1:3-7에서 환란(고난)을 5번, '위로'라는 말을 10번 사용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라는 의식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이스말로 위로하다는 파라칼레오입니다. 이것은 ‘나란히 (같은 자리로, 곁에)’ 라는 말과 ‘부르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란 우리를 고통과 시련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도 위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제 혼자서 위로받고, 저 혼자서 위로할 수 없습니다. 위로는 두 세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동류의식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라는 말에는 ‘나는 네 마음을 알아, 나는 너와 함께 있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는 나에게 곡 필요한 사람이야, 너는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위로하는 말은 하려던 일이 좌절되어 낙심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일어나 도전할 용기를 생기게 합니다. 위로라는 말에는 ‘너와 나는 힘을 합쳐, 고통을 함께 감당할 수 있어. 앞길을 두려워하지 마라’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6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성령님을 가리켜 요한복음은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말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는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문자 그대로 상담자(counselor) 위로자(comforter) 돕는 자(helper)입니다. 사66:13-14입니다.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지금은 시술로 많이 하지만, 그전에는 심장 수술이 아주 큰 수술입니다. 심장수술을 받은 어떤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술을 앞두고 마취를 하기 전에 간호사가 와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수술하는 동안 당신 심장은 몸과 분리됩니다. 당신은 오직 기계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기계를 통해서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수술 후 심장과 당심 몸이 연결되더라도,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회복실에 있는 6시간 동안 당신은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손을 움직이고 싶어도 손이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며, 눈을 돌리고 싶어도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지금 내가 당신 곁에 있는 것처럼, 나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몸이 일으키는 반응을 일일이 다 체크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를 것입니다. 당신이 회복실에 돌아와서 깨어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당신 곁에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간호사가 하는 이런 말을 듣는 동안에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마음이 푹 놓이더랍니다. 이 간호사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 사람은 보혜사 성령님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우울하든지, 우리 마음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든지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게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니까?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성령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각을 초월하시는 성령님은 언제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위로자요 협력자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3-11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이 무엇입니까? 고난(환란)도 아니요, 위로도 아니요, ‘우리’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펴서 고후 1:3-11을 한목소리로 읽으면서, ‘우리’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볼까요?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7번. 정말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에는 ‘나’도 포함되고 ‘너’도 포함하는 말 그대로 ‘우리’입니다. 만일 수도교회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끼리 위로하고, 우리끼리 위로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 가서 영적인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저 순복음 교회 교인에게 가서 위로를 받을까요? 저 사랑의 교회 교인에게 가서 위로를 받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위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살이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쉽지 않지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하시는 목회자와 장로님을 만나고, 위로하시는 권사님을 만나고, 위로하시는 집사님을 만나고, 위로하시는 성도님을 만나면, 세상근심걱정, 세상 고통과 역경을 여유있게 감당할 힘과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만일 수도교회를 위로하지 못하는 교회로 만든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일까요? 만일 우리가 수도교회 성도로서, 위로하지 못하는 성도가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교회가 위로의 공동체가 된다는 말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우리 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만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모두에게 주신 사명을 이사야는 40:1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비록 자기 자신에게도 위로받아야 할 일이 산더미 같더라도, 상처있는 치유자의 심정으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고, 또 위로의 하나님을 전하시는 여러분에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은총이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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