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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곳에 서다(왕상 19,9-12; 막 6,47-52) - 전문
운영자 2020-03-15 추천 3 댓글 0 조회 93

200315(왕상 19,9-12; 막 6,47-52)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1-3)

 

왕상 19,9-12; 막 6,47-52

바람 부는 곳에 서다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오늘의 증언

 

샬롬~~~ 성도 여러분 얼굴을 직접 뵙지 못하고 영상예배를 세 주째 드리니, 여러분이 더욱 그립습니다. 주일과 수요일이면 열일을 제쳐놓고 예배드리러 오시는 분들, 주일마다 교회 주변을 청소하시는 분들, 찬양대원들, 호산나 크로마하프 찬양단원들, 셀라 찬양단원들, 주방봉사하시는 분들, 쉼터에서 수고하시는 분들, 교회학교 선생님들, 사랑부-어린이부-청소년부 2세들 모두 모두가 다 보고 싶습니다. 서로 보고 싶어하는 마음과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서로 서로에게 ‘샬롬’의 인사를 하겠습니다. ‘샬롬 ~~~’

 

이 그리운 시간에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예배를 드리면 잡아가겠다고 총이나 칼이나 수갑을 가지고 위협할 때에는 예배당에 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이다. 예배의 모임이 칼이 되어 누군가의 건강이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때에는 예배당 대신에 홀로 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 인생에는 풍파가 많습니다. 예언자 엘리야 역시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바알숭배자들에 맞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왕비 이세벨의 역풍을 만나, 산으로 멀리 피신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배 타고 가는 길에서역풍을 만났습니다. 그 바람이 불어올 때가 언제입니까?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하여 2만 여명을 먹이는데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이때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위상이 사람들 앞에 최대로 드러난 날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요 6:14-15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4-15)

 

군중들이 자신을 경제적 메시야, 정치적 메시아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 다른 곳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강권하여 벳새다로 항해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그들을 보내신 다음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순풍에 돛단 듯이 잘 나아갔습니다. 닻을 높이 달고 바람을 한 아름 안고 소풍을 가듯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콧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어부출신이니 아주 낯익고 익숙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항해이니 좋은 일이 앞에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순풍에 돛단 듯 인생 항해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합니다. 자녀도 잘 살고 있습니다. 기업이 잘 돌아가고 직장이 든든합니다. 건강합니다. 특별한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와같이 언제나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제자들에게도 그 순풍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48절 앞부분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갑자기 인생 항해에 역풍을 만났습니다. 경제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건강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신앙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자녀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가정에 역풍이 불어옵니다. 인간관계의 역풍이 다가 옵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의 아들은 신경외과에서 매우 권위 있는 의사입니다. 어느 날 그를 만나니 “어머님이 겪는 고통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안타깝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에게는 자신의 처방보다는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익숙한 지식이나 경험도 역풍을 해결하는데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생에 다가 오는 역풍 앞에 지식도, 돈도, 권력도 아무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아무리 노를 저어도 한 치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48절에 보니 밤 4경까지도 사투를 벌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해가 지는 일몰부터 해가 뜨는 일출까지 곧 술시(저녁 7시)부터 신시(인시, 새벽 5시)까지 밤 시간을 5등분했습니다. 거기에 경(更)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1경의 길이는 2시간 정도입니다. 초경(유시)은 저녁 7~9시, 2경(해시)은 9~11시, 3경(자시)은 11~새벽 1시, 4경(축시)은 1~3시, 5경(인시)은 3~5시, 6경(묘시)은 5-7시입니다.

 

마가복음에 시간은 우리 나라의 그것과 다릅니다. 유대인은 밤 시간을 네 시간씩 3등분, 로마인은 밤 시간을 세 시간씩 넷으로 구분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의 시간 구분법에 따라 일경은 오후 6시에서 9시, 이경은 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은 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로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4경, 새벽 6시까지 사투를 벌였습니다. 풍랑을 이기려 안간힘을 다하는 그 밤이 그들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요셉이 역경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다가 갑자기 역풍이 불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다윗도 역경을 만났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하루아침에 백성들의 인기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사울의 시기를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자 숨어살았습니다. 욥도 역경을 만났습니다. 동방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자식들과 다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있던 모든 재산 다 잃어버리고 자식들까지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역풍을 만났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예고하듯이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폭풍은 세 가지라고 합니다. 1) 핵(핵무기, 핵발전소), 2) 기후변화, 3) 바이러스. 특히 바이러스 팬더믹은 남극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더욱 더 기승을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 고난의 문제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의 문제를 정확히 해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때 도와 줄 사람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 권세와 부귀영화, 지식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닫습니다. 죽음 앞에, 자존심과 명예,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고난의 의미, 역풍의 이유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곳에 선 우리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때가 영안을 뜨기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사람은 풍랑을 통해 멀리 보는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가장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시간은 밝을 때가 아니라 어두울 때입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별까지도 볼 수 있는 시간은 밝은 대낮이 아니라 칠흑 같은 밤입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보입니다.

 

고난의 역풍이 불 때 우리는 평소 멀게만 느껴지던 천국을 바라봅니다. 천국을 바라볼 때 실제의 풍랑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 마음속의 풍랑이 먼저 사라집니다. 그리고 세상의 풍랑은 대수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태풍을 잠재우는 예수님이 계시면 세상의 풍랑은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도 미미합니다. 유리 잔속의 물은 아무리 큰바람이 불어와도 파도처럼 출렁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작은 동전이 우리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도 그 동전을 거둬내면 푸른 초장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눈으로 보기만 하고 수수방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고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폭풍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잊혀진 사람으로 사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가셨습니다. 모세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한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역경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의 고난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 먼저 보내셨어도 눈에서 멀어진다고 마음마저 멀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48절입니다.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예수님은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 신음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아십니다. 막막한 대해 같은 세상에서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가는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을 아십니다.

 

역풍을 만난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Qarsei/te\ evgw, eivmi( mh. fobei/sqe)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50절의 “내니”(에고 에이미 evgw, eivmi)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이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출 3:14). 예수님은 “나” 라는 선언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theophany)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요 8:58) 이 말씀은 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치시는 만유의 주, 메시아이심을 ‘나다’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셨습니다.

 

51절에 보니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일순간에 바람이 그쳤습니다. 이 때 이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51절) 그들은 바로 그날 낮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는데도 여전히 믿음으로 굳게 서지 못한 채 오히려 바람 부는 곳에 서 있었습니다.(52절)

 

혹시 제자들의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지낸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정작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나요?

 

역풍이 부는 생활의 터전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이 세상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역풍이 부는 곳에 찾아 와서 인생의 파고를 잠잠하게 만드시는 메시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약속한 천국으로 이끄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그리운 교회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가정에서 영상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5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고난일수도 있고 아픔일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풍조와 세태에 휩쓸리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처음엔 달콤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유혹하는 손짓으로 바뀝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성령의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살이 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그 바람 자체에 휘둘리느냐 아니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느냐를 결단해야 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날려보낼듯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들릴락말락하는 가느다란 하나님의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에 고요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상을 진동시킵니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코로나19 바이러스 이야기입니다. 코로나 19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러 고요하고 침착하게 찾아오십니다. 세상 시끄럽고 속 시끄럽게 하는 소리에만 끌려가는 대신에 따스하고 부드럽게 다정하게 우리 마음과 영혼을 감사주시는 주님의 속삭이듯 작은 말씀에 집중해봅니다. 마치 역풍을 만나 배를 저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찾아오시며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하시는 주님처럼 경제난과 육체적인 고통과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는 우리를 만나러 예수님이 살며시 다가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바람 부는 곳에 서 있다면, 그 바람이 거세다면, 그만큼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지닌 세속적인 관심과 세상적인 바람을 잠재우고, 성령의 바람으로 굳건히 세우고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힘겨운 고갯길, 세차게 바람 부는 언덕길에서도 든든히 서고, 최후 승리를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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