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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서다(출애굽기 3:1-5, 갈라디아서 1:11-17) - 전문 운영자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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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1,11-17

광야에 서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 오늘의 증언

 

오늘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1년째 되는 날입니다. 비록 지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난 삼일운동을 기념할 분위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 날과 이 날을 위해 함께 일어섰던 우리 조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보여준 애국애족하는 정신과 용기는 그때 그 시절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공동예배를 함께 모여 드리지 못하고 영상예배로 드립니다. 교회 창립 6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저나 여러분이나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성도 여러분께서 고민하시면서 절제를 어렵게 요청하셨습니다. 다른 한편 구청과 주민센터도 주일 공동예배를 자제해 달라는 팩스와 전화를 계속 보내왔습니다. 언론에서도 개신교회에게 자제를 부탁하는 기사를 연일 올렸습니다. 이런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일만큼은 함께 모여 공동예배를 드려야한다는 신앙을 지닌 우리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저에게 고등학교 때 읽었던 글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당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수학하면 수학정석영어하면 성문종합영어를 보았습니다. 그때 성문종합영어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중세기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널리 퍼졌을 때입니다. 15-6세기 유렵에 널리 퍼진 페스트는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이 줄어들만큼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하는 말씀 하나만 붙들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자는 심정으로,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빽빽하게 둘러앉아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페스트 병원체에 실제 감염된 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 기도회가 끝난 뒤 더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에 감염되었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심만 있고 앞뒤를 분간하지 않는 신앙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대비시킵니다. 열심만 가득한 신앙은 겉보기에 아주 훌륭하고 뜨거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자칫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인간을 향한 배려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병원체에 감염되면 신자든 비신자든 다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전염 병원체는 전염될 만한 환경 아래에서는 신자냐 불신자냐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이 전염 병원체의 정확한 이름은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2’(SARS-CoV-2)입니다. 이것은 전염 병원체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반드시 주일을 성수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위와 사실을 잘 알기에 전염병이 돌 때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하게 피신하는 것을 지혜로운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칼빈 루터 같은 분들 자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아있는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성도들이 잠시 예배당을 떠나 전염 병원체를 피신하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츠빙글리 자신도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다가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우리는 일단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대신에 영상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이 영상예배에도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 못지않은 진지함과 열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 고생하며 사는 히브리 사람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죽이라는 파라오 왕의 명령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차마 그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대 상자에 아이를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아기를 이집트 공주의 눈에 띄게 만드셨습니다. 공주는 그 아기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2:10). 그런데 이 모세라는 이름이 참 기가 막히게 멋있는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성서는 이 이름에서 끌어내다(to draw out)는 뜻을 지닌 마샤(hvm)와 연결시킵니다. 모세는 이 단어의 능동분사형인데, 모셰(hv,mo)끌어내는 자, 끌어내는 것을 뜻합니다(63:11을 직역하면, 그들이 옛적에 그의 백성을 이끌어 낸 자를 기억하였다입니다).

 

이집트말로는 이것이 내 아들이란 말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파라오의 이름 가운데 라므세스는 태양의 ’(혹은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투트모시스는 투트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라는 낱말을 들을 때,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고역과 고통에서) 이끌어낼(= 구원할) 사람을 보내셨구나라고 생각하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똑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파라오의 공주에게 아들이 하나 생겼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의 이름을 놓고 각각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것이 얼마나 절묘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아기에게 기가 막히게 멋진 이름을 지어주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이집트 왕실에서 공주의 아들로 대우받던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키우는 목동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아주 평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모두가 무시하는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목동을 지극히 높이고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40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 사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무리를 박해하러 다마스커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정오 무렵 갑자기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더니, 그가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 사람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고,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눈을 떴습니다.(9:17-18)

 

그때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어디로 갔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16...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6-17)

 

여기서 아라비아는 광야, 사막지대를 가리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한 뒤 이름을 바울로 고친 그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3년 내지 6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귀하게 대접받던 자리를 떠나 광야에 선 모세와 바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성도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번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일에서도 한국교회와 성도는 거친 광야에 서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각 가정이나 개인도 거친 광야에 서 있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모양과 내용은 제각각이라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생 전체가 광야에 서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세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뜨거운 태양별을 받으면 저절로 발화하여 타 없어지는 떨기나무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불이 붙더라도 그것이 타버리거나 재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물컹물컹하던 모세를 광야생활 하는 동안 딴딴하고 단단한 모세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울이 길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지탱해온 것들이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는 일어설 기력도 없었고, 눈까지 멀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예수 그리스도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지식과 지위에 따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던 사울을 아라비아 사막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거기서 그를 딴딴하고 단단한 바울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와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러하였듯이 광야가 우리의 현실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비록 광야같이 거친 현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라도, 또 다른 현실의 한 부분에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게십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미래의 대한 소망이 잘 보이지 않을 지라도 절대로 그것이 현실의 전부도 끝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현실의 일부분이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직 다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이미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붙듭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지나 부활하셔서, 부활과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재난과 환난은 인류 역사에 늘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환난과 재난 때가 지난 다음에 보면 깨달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각성하는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이 환난이 지난 다음에 무엇을 남을까요? 원망과 불평, 고통과 죽음의 생채기가 남을까요? 서로 위로하고 존중하며 환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위대한 역사가 남을까요? 이것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환난 가운데 서로 돕고 아끼면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위대한 새역사를 써 나가는 우리 교회들과 한민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세월 여러분은 광야 길을 어떻게 걸어오셨습니까? 지금은 또 어떤 광야에 서 계십니까? 저는 광야 길을 이렇게 표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새로운 소망이 있는 축복 가득한 길,’ 왜냐하면 하나님은 혹독한 광야 길에서도 우리를 더욱 은혜롭게, 따뜻하게, 안전하게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호모 데우스’(homo deus), 신이 된 인간, 인간이 신이라며 교만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책도 버젓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인공지능(AI)시대를 열어가며 인간이 신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인간이 곧 신이라면, 지금 창궐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인간이 신이라면 그까짓 코로나 바이러스 쯤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집트에 창궐하게 했던 피부병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셨듯이, 단숨에 날려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바로 신이다고 큰소리쳤던 자들마저도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맥을 못춥니다. 두려워합니다. 아직 백신이나 치료약조차 변변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지금은 인간이 신이라고 호모 데우스라고 허풍을 떨 처지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창조질서 앞에 조용히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창궐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생존이 위협당하는 광야에 섰습니다. 다른 한편 지금은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과 세심하신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한 광야시대입니다. 이 광야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성의껏 따르게 하는 곳, 평생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곳, 친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나게 하는 곳, 더 좋은 본향을 바라보게 하는 곳입니다.

 

이번에 창궐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우리에게 더 겸손하게 피조물의 본분과 역할을 깨닫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생 동안 걸어가야 하는 광야 길, 그 모양과 내용은 각양각색이라도 마냥 어렵고, 힘들고, 지치는 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겪어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과 은혜들을 마음껏 누리며 기쁨의 길, 소망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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