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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정주현 201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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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강론 후의 환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1888년, 73x92cm, 캔버스 위에 유화, 영극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미술관 소장, La vision après le sermon, Paul Gauguin)

 

고흐, 세잔과 더불어 19세기 서구의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전혀 세련되지 못한 특유의 둔탁한 화필과 투박하게 혼합된 원색을 통해 얄팍한 이기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는 약삭빠른 문명인들의 속내를 비판한 프랑스의 화가다.

 

광기로 가득한 원시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고귀한 야만인으로 불린다. 특히 고희가 분노와 갈등을 참지 못해 귀를 자르는 원인의 제공자가 고갱이며,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만나는 대책 없는 원시인’, 원시를 동경해서 타히티라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먼 이국에서 고독하고 힘든 삶을 영위한 그의 인생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인 그 주인공이 바로 고갱이다. 고갱이 그린 그림을 보면 두 가지 양상이 특이하게 나타난다. 하나는 화폭에 원색들이 널따란 색면으로 밋밋하게 그려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림 속의 형태와 형태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미술사에서는 종합주의구획주의로 칭하는 것으로, 이는 곧 그림의 생명이 장식성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었고, 훗날 나비파라는 새로운 화풍을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런 가공되지 않은 색면과 더불어 경계 획정적인 형상이 결코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꿈과 상상력이라는 내면의식을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의 예술을 상징주의라 하기도 한다. 이런 그의 복합적 회화 양상을 단박에 드러낸 작품으로 일명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라고도 하는 강론 후의 환영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고갱이 원시를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기 전, 프랑스 서부의 한가한 농촌인 브르타뉴 지방에 머물면서 그린 것으로, 그 농촌지방의 지방색이 역력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 지방 전래의 퐁 라베 복식을 한 여인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원색으로 표현된 이들의 소박한 인성이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현실과 환영의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 곧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가 함께 표현된 초현실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여인들은 사제의 강론을 듣는 여인들이라는 실제 현실이며, 천사와 야곱이 결전을 치르는 부분은 강론의 내용으로 여인들이 상상하는 환영의 세계인데, 이 두 세계가 대각선으로 놓인 굵고 커다란 나무를 경계로 위아래로 나뉘어 있다.

 

기도하는 농부 여인들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모습, 그 자태와 기도하는 손을 보면 하느님께서 명하신 하루의 일상을 이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가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자연친화적 삶, 땅과 더불어 사는 삶, 우직한 신앙의 힘이 농사일과 농부들의 심성을 대변하는 소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론 유다교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황소이자, 황소는 야훼의 위대한 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 그림의 붉은색으로 표현된 공간은 열정의 공간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평소 영위하는 열렬한 신앙의 삶을 대변한다. 그리고 야곱이 하느님과 결전을 벌이는 모습은 이 지역 고유의 씨름경기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또한 신앙의 힘을 잃지 않으려는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갱이 이 성경의 주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가난과 봉사의 색인 푸른색과 영광과 희망의 상승을 나타내는 노란색 날개를 한 천사와 격렬하게 한판 붙은 야곱의 색은 검은색이다. 이 검은색은 죽음의 색이자 사탄의 색이다. 그런데 이 색은 강론을 들은 뒤 이 광경을 상상하며 기도하는 여인들의 옷 색깔과 같다. 먼저 성경의 이야기를 참고해 보자.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5-29).

 

이스라엘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싸우신다또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결전은 천사를 내동댕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 천사를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는 야곱의 의지가 아닌가? 천사를 놓친다는 것은 곧 믿음과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며, 이는 곧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죽음의 나락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빌미로 절대 천사를 놓지 않는 것이다. 이 그림의 야곱과 여인들의 검은색은 바로 경계의 색이다. 이들이 인간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이미 사탄의 물에 젖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소박하고 신앙 제일의 삶을 산다 하더라도 사탄의 마수는 언제나 우리에게 닿아있다는 것을 이 색깔이 암시하는 것이다. 이 사탄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면 천사 곧 하느님과 신앙의 끈을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는 야곱의 의지가 그림 속 씨름 자세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천사를 넘어뜨리려는 자세가 아니라 천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간절한 자세를 야곱은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야곱의 의지에 동참하고자 한 것인가?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들은 마음과 머릿속에 신앙의 열정이라는 환상의 나래를 편다. 이런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가진 여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편하고 성실해 보이며, 이들의 마음과 신앙의 주님을 흠모하는 심정이 어느덧 흰색 모자를 통해 현현되고 있다.

 

이처럼 고갱은 특유의 색채 평면을 통해 이미 마귀의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과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은 이런 격렬한 싸움과도 같은 것이며, 동시에 성스런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면 악착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해 신앙과 소박한 인간 본연의 마음을 상실한 문명인들이 고갱의 눈에는 사탄의 마수에서 허덕이는 불행한 사람들로 보였을까? 이런 촌스런화풍을 위주로 세인들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급기야 가장 자연적인 삶을 찾아 타히티로 떠나 온갖 고생과 병마에 시달리며 예술적삶을 살다 간 고갱의 삶이 바로 씨름하는 야곱의 심정을 통해 표현된 것은 아닐까?

 

*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출처: [경향잡지, 20084월호, 권용준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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