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나뭇가지를 줍는 심정(왕상 17:8-16 ; 눅 7:11-17) 16.6.19 | 운영자 | 2016-06-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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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지 말아야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160킬로미터(약 400리) 떨어져 있습니다. 2)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의 고향(친정)입니다. 3) 바알 우상숭배의 근거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그리로 가라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1. 엘리야 자신을 위해 12절의 떡(마오그)은 6절과 11절의 떡(레헴)과 다릅니다. 마오그는 짐승의 마른 똥 위에 숯을 올려놓고 굽는 것입니다.(겔 4:12) 이스라엘은 이렇게 구워진 떡을 부정하여 먹지 못할 음식으로 여겼습니다. 마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더 먹고 싶어 걸금걸금하였듯이 지금 엘리야의 처지가 그러하였습니다. 처지와 형편이 이 정도로 비참해졌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굶어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할 때에도 신체적으로 가장 힘들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2. 사르밧 여인을 위해 이 여인이 잘한 일이 무엇인가요? 처음 보는 사람 엘리야에게서 듣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 여인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쁘면 즐거워하고 기분 나쁘면 화를 내고 ... 어떤 사람에게는 환영받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냉대를 당하고 .... 성경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식이 넉넉한 집안에 엘리야를 보내면 안 됩니까? 꼭 그 집에 가서 그 한 끼 식량 밖에 없는 것을 엘리야가 먹어 치워야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대로 하라.”는 것만 알뿐입니다. 3. 페키니아(시돈) 사람을 위해 시돈은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바알과 아낫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소굴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에는 아마 그곳 사람들을 향한 큰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세벨 왕비가 오면서부터 바알 종교가 온통 나라를 뒤집어엎어 정신문화가 다 망가졌고 하나님을 믿는 고상한 아브라함의 후손의 정서는 다 사라졌고 이로 인하여 이 땅이 이렇게 굶어죽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하였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제공한 곳이 바로 시돈이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은 흔히 자신에게 원인을 돌리기보다는 남의 탓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싹 쓸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를 교육시키셨습니다. 적어도 시돈에 가서 3년 이상 살게 하셨습니다. 또 가난한 집에서 얻어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 사는 동안에 그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아! 시돈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이렇게 불쌍한 시돈의 백성이 아니라 우상 숭배이다.’ 우리에게는 위와 같이 마지막 나뭇가지를 줍는 심정으로 사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그릿 시냇가가 말랐듯이 의지와 의욕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는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나뭇가지를 줍듯이 인생의 계획도 소망도 다 버려야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지금까지 멀리하며 지냈던 사람들만 주변에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내 마음을 힘들게 하고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듭니다.” 열왕기 상 17장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기한 은총을 보여줍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왕상 17:7) ...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 17:16)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마지막 나뭇가지를 줍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온전히 실현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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